하늘 연작, 2025, 장지에 수묵담채, 가변 크기 Sky series, 2025, ink and color on jangji, Dimensions variable
나그네의 외투
2025. 10. 18. – 2025. 11. 09. 부피 (종로구 53-24 옥상, 서울)
작가 서문 그래픽 디자인 사진 설치 도움
임채홍 최지희 김경수 지윤구 강주홍 김다솔 김해성
이야기의 잘 알려진 결말에서 해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고 북풍과의 내기에서 이긴다. 그러나 이 승패에 작용한 것은 단지 해의 설득만이 아니다. 차가운 바람이 멈추었고 햇빛이 계속될 것이라는 가정, 겉옷을 벗어 손에 들기로 한 결정, 외투를 벗는 행위에는 나그네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북풍과 해님」의 힘겨루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해와 바람이 존재하는 길 위에서 변화하는 ‘나그네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전시 《나그네의 외투》는 해와 바람이 있는 옥상을 나그네의 여로에 비유한다. 임채홍이 능동적인 물질로 보는 한지를 매체 삼는 ‘한지 회화’는 ‘나그네’가, 그 회화를 ‘관습으로 바라보는 틀’은 ‘나그네의 외투’가 된다.
한지는 흔히 전통 회화의 관념적 재료로 여겨진다. 하지만 전통성이 한지가 가진 전부는 아니다. 한지는 펄프가 아닌 섬유질을 주 재료로 삼는다. 굵은 조직을 가지기 때문에 이들의 느슨한 엮임 사이로는 빛이 쉽게 투과되고 따라서 한지는 투명성을 가지게 된다. 안료는 겉에 발리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조직을 매우며 통제할 수 없이 스미고 번진다. 덧칠해진 안료는 종이의 내부에서 섞인다. 한지는 섬유질의 엮임으로 이루어지지만 캔버스와 같은 천이 아니다. 따라서, 유연하고 질기지만, 구겨지고 접히면 비가역적인 시간의 흔적이 남는다. 작가가 "양면 회화"라고 부르는 그의 작품은 이러한 한지의 물성을 통해 구현된다.
물성과 관념성이라는 두 가지의 성질의 관계는 전시에 걸린 〈하늘〉 연작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이상적 자연관, 원법·준법으로 귀결되는 전통 화론”에 의문을 가진다. 도시화와 기후 위기라는 오늘날의 생활상과 괴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한지의 물성에 매력을 느낀다. 작가는 〈하늘〉 연작에서 전통 화론에 따라서라면 여백으로 남겨야 하는 하늘만을 전폭에 담는다. 한지라는 매체가 가진 물질과 관념 사이에서 그가 거부하고 수용하는, 비동의와 동의가 교차하고 충돌하는 관계와, 이를 결정하는 그의 고민이 드러난다. 이러한 고민을 연장해 전시 《나그네의 외투》에서 작가는 〈하늘〉 연작을 옥상에 “행잉”한다. 전통 화론에서 벗어나, 실재하는 환경의 조건과 상응하며 작품이 변화하는, 다중 시점의 한국화를 그리는 새로운 화법을 실험한다.
이곳에서 〈하늘〉은 프레임을 벗고 하늘에 걸린다. 프레임이 부여하던 전면성에서 벗어나 온전한 양면으로 거듭난다. 바람에 의해 흔들리고, 다시 구겨지고 펴지며, 변화하는 습도와 온도, 빛과 바람을 만난다. 옥상에 존재하는 하늘과 이곳을 찾은 관객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으며 다른 모습으로 변해간다. 쬐는 햇빛에 외투를 벗은 나그네처럼, 자신의 외부와 스스로 관계를 맺으며 영향을 받는다. 옥상 위에서 한지는 더 이상 한국화의 관념적 재료나 회화의 평면이 아니라 햇빛과 바람, 시점과 시간, 그리고 우리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달라지는 장소’가 된다. 변화하는 한지처럼 회화 또한 바람에 따른 미세한 흔들림에 매 순간 구성이 바뀐다. 회화는 결과물이 아니라 진행 중인 장면으로 선다. 역설적이게도, 이곳에서 절대적인 것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절대성의 불가능이다. 그러니, 작품 사이를 걸으며 〈하늘〉의 비침과 겹침과 주름의 변화를 자신의 움직임과 함께 읽어내고, 변화와 공존을 체득할 수 있길 바란다.